다나카 미쓰라는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991년, 대학 2학년 때였다. 당시 애독했던 잡지 『임팩션』에서 ‘리브 20년’이라는 특집을 꾸몄고 그 권두에 다나카 미쓰 인터뷰가 실렸었다. 그의 말을 접하면서 처음으로 운동 속에서 ‘긍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고, 나의 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여자>라면,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자>라면 자기가 부분으로만 살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해야겠다. 누구에 의해서? 물론 남자에 의해서-.” 이렇게 시작되는 장문의 전단지는 ‘부분’으로만 살기를 강요당하고 있는 여성의 해방을 통해 총체적인 인간 해방을 모색하려고 하며, 총체로서의 여성을 ‘어머니’와 ‘변소’라는 부분으로 분할하는 남성의 성의식을 문제 삼는다. 그런데 그것은 남성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남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논의이기도 한다. 여성을 ‘변소’로 보는 남성은 스스로를 ‘오물’로 보고 있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여성을 변소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은 동시에 남성을 오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해방을 위해 그가 주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성’이다. 다나카 미쓰는 ‘남성=논리적, 여성=직관적’이라는 구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 안으면서 직관에 대한 논리의 우위라는 위계를 전복하려고 한다. 과거 여성운동이 여성도 논리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결과 오히려 여성성을 없애고 남성화하는 경향을 띠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자로밖에 살지 못하는 이에게, <여자임>을 따져 묻는 일을 통해서만 <여자>를 <인간>으로 보편화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그가 계속 강조한 ‘평정심을 잃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取り乱す)의 중요성은 이런 입장에서 비롯된다. ‘논리적인’ 남성 앞에서 ‘그래, 나 논리 같은 거 없어, 어쩔래!’ 하고 외칠 때 논리의 외피는 벗겨지며 적나라한 ‘우리’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는 나의 감정이나 느낌 같은 것을 긍정하고 드러내는 것. 그것이 ‘인간 해방’의 출발점이다.
물론 본인도 인정하듯이 “<여자임>을 통해 <인간 해방>을 지향하는 구체적인 이미지”는 선명하진 않다. 하지만 그가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서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은 충분히 음미해볼 만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재로서는 단지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끝까지 싸워내는 것=패배해내는 것이 다음 한 발짝을 내딛게 하리라는 것뿐이다.” 여기에는 미래의 청사진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가야 할 ‘미래’가 미리 설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승리를 목표로 하게 되겠지만 그런 것이 없는 경우, 승패가 아니라 끝까지 싸우는 것 자체가 중요해진다. 그때 패배는 다음 행동을 위한 공간이 열리는 계기가 될 수 있고, 거기서 행동을 이어갈 누군가가 나타날 거라는 믿음이 있으면 패배는 결코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믿음. 오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다.
글 : 후지이 다케시
자료정보 : ‘변소로부터의 해방’, 1970년 8월. 당시 여성해방연락회의(준비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일본 우먼리브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는 다나카 미쓰(田中美津)가 개인 명의로 살포한 손글씨 전단지. 溝口明代・佐伯洋子・三木草子編, 『資料 日本ウーマンリブ史』Ⅰ(京都: 松香堂書店, 1992), 201~207쪽에 수록.
“당신이 <여자>라면,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자>라면 자기가 부분으로만 살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해야겠다. 누구에 의해서? 물론 남자에 의해서-.” 이렇게 시작되는 장문의 전단지는 ‘부분’으로만 살기를 강요당하고 있는 여성의 해방을 통해 총체적인 인간 해방을 모색하려고 하며, 총체로서의 여성을 ‘어머니’와 ‘변소’라는 부분으로 분할하는 남성의 성의식을 문제 삼는다. 그런데 그것은 남성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남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논의이기도 한다. 여성을 ‘변소’로 보는 남성은 스스로를 ‘오물’로 보고 있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여성을 변소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은 동시에 남성을 오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해방을 위해 그가 주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성’이다. 다나카 미쓰는 ‘남성=논리적, 여성=직관적’이라는 구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 안으면서 직관에 대한 논리의 우위라는 위계를 전복하려고 한다. 과거 여성운동이 여성도 논리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결과 오히려 여성성을 없애고 남성화하는 경향을 띠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자로밖에 살지 못하는 이에게, <여자임>을 따져 묻는 일을 통해서만 <여자>를 <인간>으로 보편화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그가 계속 강조한 ‘평정심을 잃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取り乱す)의 중요성은 이런 입장에서 비롯된다. ‘논리적인’ 남성 앞에서 ‘그래, 나 논리 같은 거 없어, 어쩔래!’ 하고 외칠 때 논리의 외피는 벗겨지며 적나라한 ‘우리’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는 나의 감정이나 느낌 같은 것을 긍정하고 드러내는 것. 그것이 ‘인간 해방’의 출발점이다.
물론 본인도 인정하듯이 “<여자임>을 통해 <인간 해방>을 지향하는 구체적인 이미지”는 선명하진 않다. 하지만 그가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서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은 충분히 음미해볼 만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재로서는 단지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끝까지 싸워내는 것=패배해내는 것이 다음 한 발짝을 내딛게 하리라는 것뿐이다.” 여기에는 미래의 청사진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가야 할 ‘미래’가 미리 설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승리를 목표로 하게 되겠지만 그런 것이 없는 경우, 승패가 아니라 끝까지 싸우는 것 자체가 중요해진다. 그때 패배는 다음 행동을 위한 공간이 열리는 계기가 될 수 있고, 거기서 행동을 이어갈 누군가가 나타날 거라는 믿음이 있으면 패배는 결코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믿음. 오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다.
글 : 후지이 다케시
자료정보 : ‘변소로부터의 해방’, 1970년 8월. 당시 여성해방연락회의(준비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일본 우먼리브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는 다나카 미쓰(田中美津)가 개인 명의로 살포한 손글씨 전단지. 溝口明代・佐伯洋子・三木草子編, 『資料 日本ウーマンリブ史』Ⅰ(京都: 松香堂書店, 1992), 201~207쪽에 수록.
오물로부터의 해방